현재의 삶을 만들어내기까지 깎인 면이 셀 수 없기에 어느 정도 추상화하였다. 어떤 경계에 서있었는지, 왜 결국 개발이었는지를 풀어내보려 한다. 개발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고 미리 말씀드린다.
세 명의 희정이들
항상 어딘가의 경계선을 밟고 있는 아이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한 가지 예로 우리 반엔 나와 이름이 같은 친구가 두 명 있었다. 그들과는 다르게 나는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그냥 희정이였다.
타지 학원에 맡겨지다
꾸준하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감정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에 익숙했다. 꿈으로 삼을 생각은 못하다가 우연히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가 미대나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써 내린 장래희망에 불현듯 승부욕을 느끼고 엄마에게 달려가 미술학원을 가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녔고 평소보단 아쉬운 성적으로 수능이 끝났다. 당시 학원에 큰 사건이 일어났고 100명 가까이 되던 원생들은 10명 안팎으로 줄어있었다. 나는 남은 원생 중 한 명이었다. 원장선생님은 자비로 타지의 학원과 결연을 맺어 보증금까지 지원하여 원생들끼리 자취를 하면서 입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살,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학원 친구 2명과 자취를 시작했다. 둘에 비해 그림 실력이나 성적 둘 다 특출 나지 않았다. 몇 개월 간 그림을 완성해도 그림은 찢겼다. 항상 30분 일찍 학원을 가서 미리 준비를 해놓았고 휴일에 친구들이 본가로 갈 때 한 번도 본가를 가지 않고 소묘를 연습했다. 이렇게라도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까 싶었던 날들의 반복이었고 운 좋게 원하는 대학에 붙어 상경을 했다. 합격의 기쁨보다 묵묵했던 과정만이 먹먹하게 남아있다.
상경한 시골 쥐
기숙사를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일주일 전, 상경하게 되었다. 몸의 반 정도 되는 가방을 들고 서울역에서 버스를 탔다. 기숙사는 규정상 미리 짐을 두거나 묵을 수 없었고 같은 과 친구들의 배려로 그들의 본가에 1박씩 머물렀다. 이후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1년 후 연합 기숙사로 옮기게 되었고 또 얼마 안 되어 옥탑방으로 이사를 갔다. 3년 정도를 살다가 집주인에게 쫓겨나는 등 이리저리 서울에서의 삶을 보냈다.
가구조형전공으로 졸업하기까지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값진 경험을 많이 쌓았다. 쉼 없이 일자리를 얻었다. 좋은 기회로 미국에 텍스트 콜라주 포스터를 전시할 기회가 생겼는데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전시로 변경된 일이 생겼다. 코로나와 관련된 뉴스가 빗발칠 때 지속가능한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나의 이력과 연결 지어 UI/UX의 길을 권유했고 바로 다음날 학원을 등록했다. 상담해 주시는 분께서 다른 디자이너와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HTML, CSS, JS 강의를 추천해 주셨다.
웹 퍼블리셔
웹퍼블리셔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웹 퍼블리싱이 즐거웠다. 웹이라는 공간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자주 떠오른다. HTML, CSS를 배우면서 alt 태그를 시작으로 웹 접근성에 대한 간단한 강의를 들었다. 팀 버너스 리의 철학이 이때까지 원하는 세계를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웹 접근성은 가지각색의 다양한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할 줄 아는 개발 문화에 발을 들이게 해 준 첫 번째 계단이었다.
제조업 회사에 웹 퍼블리셔 직무로 일하게 되었다. 첫날부터 일도 없는데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선배에게 들었다. 쓸모를 증명해내야만 했다. 2년간 나는 기획팀, 마케팅팀, 개발팀에게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핵심 역할을 했다. 퍼블리싱 가이드 제작, UI 모듈, 기획전 리뉴얼, 기능 개발, 입점몰 기술서 개편 등 몇 년간 요청사항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던 일을 내가 모두 해냈다는 소리도 들었다. 퇴근 후에 강의와 자격증 준비를 병행하며 점점 디자이너도 아닌, 개발자도 아닌 나의 포지션을 확고하게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경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되는 웹 퍼블리셔의 영역을 어떻게든 확장하고 싶었다. 회사를 안정적으로 그대로 다니거나, 미대를 나왔던 이력으로 디자이너를 택하는 방향이 누가 봐도 훨씬 편할 길이었지만 힘들 것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자를 위해 성장하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엄마는 흔쾌히 응원을 해줬다.
"50대가 되었더니 이제야 늙은 거 같다.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만 살아온 것 같으니 너는 남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봐. 50대 전까지는 그래도 돼."
2년째 되던 올해 2월 퇴사를 했다.
프론트엔드 취준생
프론트엔드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신기했던 건 이전에 내가 관심을 가진 모든 것이 녹아들을 수 있구나였다. 왜 내가 개발을 시작했어야 했는지를 깨닫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좋은 멘토이자 동료들을 만나 매 순간 좋은 자극을 얻는 중이다. 여전히 나는 경계선을 밟고 있지만 그것이 차별성이 될 수 있게 유일하게 자신 있는 장점인 묵묵함으로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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